가상과 실재가 공존하는 작품으로 질문 던지는 한성필
우리 눈이 보는 것은 실재인가, 가상인가?
한성필
1972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 졸업, 영국 킹스턴대학교 및 런던 디자인 뮤지엄 공동 프로그램 ‘큐레이팅 컨템포러리 디자인’ 석사 졸업. 2002년 첫 개인전 이후 제10회 국제 사진, 영상 비엔날레2004(텍사스) 등에서 7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사진으로 유명한 휴스턴 미술관, 대구사진 비엔날레, 렌저우 국제 사진 페스티벌, 도쿄 포일 갤러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립현대미술관, 키요사토 사진 미술관, 버밍험의 제5회 국제 이미지 페스티벌 등 국내외 주요 단체전에 초빙되었으며 아르헨티나・일본・인도네시아・미국 등 다양한 나라의 유명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서울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이진숙 미술평론가
나란히 있는 두 개의 건물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왼쪽 건물의 화려한 베란다에는 19세기 말 멋쟁이 스타일로 잘 차려입은 화가가 오만한 표정으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건물의 옥탑방 창문에는 17세기 복장을 한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들고 나와 있다. 옆의 수수한 건물에는 현대적인 차림을 한 중년 여인이 창가에 놓인 꽃을 돌보고 있다.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모여 살고, 서민들은 서민들끼리 모여 사는 우리네 삶과는 다른 풍경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건 현실이 아니라 그림이다. 실제 건물 위에 그려진 그림이다. 사실 현실은 좀더 나쁘다. 두 건물 사이로 널어놓은 빨래며, 오른쪽 귀퉁이의 허름한 카페도 보인다. 이게 이 건물을 둘러싼 현실이다. 한성필의 은 들여다볼수록 절묘하다.
좀더 들여다보면 불룩하게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벽면도 사실은 납작한 평면일 뿐이다. 잘 이해하고 싶으면 이 책에 실린 작품을 손으로 쓱 만져보시라. 종이가 평면이듯, 오른쪽 건물과 왼쪽 건물은 건물의 평평한 한 면일 뿐이다. 원근법을 잘 이해한 눈속임 그림일 뿐이다. 정지신호와 보행신호가 동시에 켜진 순간처럼 한성필의 작품 속에는 가상과 실재가 공존한다.
이 작품 속에서 진짜 나무와 그려진 나무를 구별해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이 벽그림 화가는 자신의 소망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그림 속에 한꺼번에 쌓아놓았다. 가상의 이미지도 실재처럼 느끼게 만듦으로써 사진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실재만을 보여줄 것이라는 상식의 허를 찌르는 작품은 한성필을 한국 사진계의 가장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가 주목한 작품의 소재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현재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각 도시와 나라들의 상징적인 건물들의 복원, 재건축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방진막(fence), 착시를 이용한 트롱프뢰이유(Trompe-l’oeil)의 대형 벽화”다. 그의 이름을 알린 작업은 2004년 겨울 영국 세인트 폴 성당의 복원작업을 보고 영감을 얻으면서 시작되었다.
“공사중인 성당을 정확히 복사한 실물 크기의 방진막으로 가려놓았는데, 위치에 따라서 실재의 성당 건물이 보여지기도 하고 가상의 이미지를 담은 방진막만이 보여지기도 했다. 매우 초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이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이후 가상과 실재, 원본(Original)과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생각은 이후 그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Secret Tale, 122x155 cm, Chormogenic Print, 2009
당시 그는 런던 유학 중이었다.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에 입학했던 한성필은 미술과 사진에 대한 관심 때문에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다시 입학한다. 조기졸업과 수석졸업이라는 범상치 않은 타이틀을 거머쥔 그는 뜻밖에 한국 후지필름의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평범한 샐러리맨이 된다. 유학 자금을 마련하려는 이유에서 시작했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예술가도 스스로를 경영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스스로를 경영”할 수 있는 예술가가 되기 위한 다음 행보는 대학원 선택에서도 보인다. 그는 순수미술이 아닌 큐레이팅 컨템포러리 디자인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를 통해 작품의 디스플레이와 예술의 조직, 전시 펀딩 등 예술과 시장을 이론적으로 배운 그는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다른 측면에서 스스로 이해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전업 작가로 살아가면서 부딪힐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그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길을 조직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Plastic surgery, Chormogenic Print, 2009
이미 유학 중에 한성필은 왕성한 작업을 펼치면서 작가로 데뷔하고 다양한 해외 레지던시 활동으로 경험의 폭을 넓혀왔다. 런던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때부터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진계에서 명망이 높은 휴스턴의 포토페스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인스티튜트 개인전, 한국문예진흥기금과 파라다이스문화재단 후원으로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리는 제16회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개인전을 가지며 착실하게 작가로서의 경력을 쌓아왔다. 프랑스 유네스코 아쉬버그 기금 지원 작가로 선정되어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작업을 하고, 프랑스의 카막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는 삼성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시테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프랑스에 1년동안 머물고 여행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올해 9월에는 미국의 산타모니카에서 작업할 예정이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그간 축적해온 작품들을 쏟아내며 평단과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월간 <사진예술> 편집장 윤세영 씨는 가장 주목할 만한 14인의 한국 사진가 중 한 명으로 한성필을 선정하며 “앞으로 새로운 예술을 제시할 역량 있는 작가”라고 평했다.
The Dominion of Ligh, 147x117cm, Chormogenic Print, 2006
재건축 현장 가리는 방진막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존재
가상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그의 의도는 교묘한 빛의 사용으로 더 극대화된다. 한성필은 가상과 실재의 경계를 더 모호하게 하기 위해 절묘한 시간에 사진을 찍는다. 소위 매직 아우어(Magic hour), 신비로운 푸른빛이 지배하는 여명이나 황혼이 그가 작업하는 시간이다. 빛이 5분에서 10분 사이로 달라지는 이 짧은 시간을 성공적으로 잡아내기 위해서 그는 며칠을 그 도시에 머물며 작업하곤 한다. 그러므로 한성필의 휴대폰은 많은 경우 해외 로밍 중이다.
The Ivy Space, 122x155 cm, Chormogenic Print, 2009
방진막을 소재로 한 작품에는 과거-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의 모습이 담긴다. 서울에서는 남대문, 동대문, 명동성당과 건축가 김수근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공간(空間)’이 그의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어이없는 방화로 소실된 남대문의 모습이 수백 장의 사진을 연결해서 만든 방진막으로 다시 등장하였다. 이 방진막은 재건축의 어수선한 현장을 가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복원 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상이기도 하다.
〈성형수술〉이라는 다소간 풍자적인 제목을 붙인 이 작품은 한편 사진의 다큐멘터리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가상인 동시에 그 안에 실재를 담고 있는 남대문 공사현장의 방진막은 현재의 부재를 감추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함으로써 사진 속에 역사를 담아낸다. 그러나 역사는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진리라는 데는 의문이 생긴다. 〈성형수술〉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새롭게 등장할 남대문은 우리가 아는 남대문의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이상 원본(Original)이 아니라 남대문의 이미지를 재현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Tour Eiffel, 122x155 cm, Chormogenic Print, 2009
그는 장자의 제물론 중에서 “지금의 나는 정말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지금의 나는 과연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로 변한 것인가”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이런 상황을 설명한다. 그의 작품은 거대한 사이버 세상이 펼쳐지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거대한 가상일지도 모른다는 영화 〈매트릭스〉의 설정의 사진적 발견이다. 더 나아가 그의 작품은 현실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서 이 ‘호접몽’적인 상황을 더 강화시킨다. 얼마 전 그는 작품을 거대한 천에 프린트해서 잔다리 갤러리 외관을 방진막처럼 둘러쌌다.
작품으로 둘러싸인 건물은 실용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예술을 위한 존재, 예술 자체가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조만간 실제 방진막이 된 그의 작품을 곧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상과 실재뿐 아니라 예술과 삶의 경계도 진정으로 사라질 것이다. 작가란 “일상에서 남다른 관점에서 항상 새로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맞는 해법을 제시하며 새롭게 패러다임을 바꾸어나가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말을 그는 조용히 실천한다. 9월에 있을 미국 산타 모니카 프로젝트 때문에 그의 휴대폰은 다시 “해외 로밍 중”이라는 안내를 내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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