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동호회 ‘Thieves(도둑들)’의 첫 사진전 ‘훔.치.다’에 갔었다. 구성원 세 사람은 ‘사진은 모든 것에 흐르는 빛을 훔쳐 내는 작업’이라는 점에 의기투합하면서 독특한 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 서로 다른 앵글로 훔쳐낸 빛 또한 의기 못지않게 독특하고 신선했다. 그중 이승희라는 작가가 파리 여행 중에 훔친 빛을 담았던 몇 점의 사진들은, 내게 22년 전 파리유학시절의 추억을 불러 일으켜주었다. 그래서 파리라는 추억의 도시를 매개로 하여 오랜 친구처럼 많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나 또한 그들의 도둑질에 매료되어 훔치는 일에 깊이 가담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스며들고 섞이느라 훔쳐낸 시간이 깊어갈수록 그들의 공존(빛을 훔쳐 내는 작업)이 내게는 평화로운 쉼이 되어주었다. 출신지역과 거주지역이 다르고 직업과 종교는 물론 전시된 작품까지 삼인삼색으로 너무 다른 그들이, 전시된 작품을 통해 공존의 평화로움을 잘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빛을 향한 우직하거나 예리한 시선에 경외심이 일었고, 신기루 같은 빛으로 투사된 숱한 땀과 수고로움이 성스럽고 거룩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대화가 길어지면서 애초 나를 초대했던 교우 작가분도 함께 앉아 사진예술과 일상 그리고 종교나 교회에까지 두루 나눔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주일마다 미사전례가 진행되는 성당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감실’과 ‘성체’에 관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종교를 갖지 않은 그녀는 가톨릭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가 방언만큼이나 낯설었을 터였다.
“성체가 뭐예요?”
“‘성체’란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중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여기면서 받아먹는 밀떡을 말합니다. 미사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빵을 쪼개어 나누어주면서 ‘이는 내 몸입니다’라고 했던 것을 매번 기념하는 예식이구요. 예수께서는 빵을 쪼개어 나누는 상징을 통해 제자들 또한 쪼개어지고 나누어져서 세상과 사람 속으로 스며들 것을 바랐던 것이지요. 가톨릭 신자들은 밀떡을 축성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믿기에 ‘성체(聖體)’라고 부릅니다. 그 성체를 받아먹을 때마다 처음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과 사람 속으로 녹고 스며들려는 결심을 매번 새롭게 하지요. 그런데 축성되지 않은 밀떡(제병)과는 달리 이미 축성된 성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므로 거룩한 곳에 따로 보관하게 되는데, 그 보관소를 감실이라고 해요.”
“어쩌면 그렇게 설명을 쉽게 잘 하세요? 명료해서 바로 이해가 되네요.”
“궁금해 하는 분이 가톨릭신자가 아니므로 그 입장에서 설명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신자가 아닌 분들에게 이런 설명을 하게 될 때, 많은 경우 꼭 필요한 본질적인 내용보다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알리는, 이른바 선교나 전교의 의미를 담아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다보면 듣는 사람 입장을 배려하기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홍보하는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듣는 이는 궁금증 해소를 원했다가 원치도 않는 전교대상자가 되었으니 심기가 편할 리 없지요. 기독신자들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 예수께서 나누었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전교를 안 하시나요?”
“궁금해 하거나 알고 싶어 하는 분들께 본질적인 내용을 알려드리는 정도는 합니다. 그러나 나와는 다른 타인의 종교심을 근본적으로 존중하기에 내 쪽에서 선교나 전교를 의도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설명을 할 때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저의 태도가 오히려 맘에 든다며 가톨릭교회에 입교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내세우려 하고 다른 종교보다 우월한 것처럼 포장하려 하는데, 그러지 않는 모습이 자신 있어 보여 더 호감이 간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그런 내용을 미리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요. 다만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실제적인 결정이나 행동은 당연히 제가 하는 것이구요.”
“저는 아직 종교를 갖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가톨릭을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파리를 여행하면서 몇 차례 성당에 갔던 적이 있었지만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쉼을 위해서였어요. 왠지 성당은 평화롭게 느껴지잖아요.”
“고마운 마음과 함께 그 느낌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신자들에게 성당이 평화로운 쉼을 주는 곳인가?’라고 묻는다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 방송에서 명동성당 예비자들을 상대로 입교하게 된 이유를 묻는 설문조사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습니다. 주일날 교중미사(중심미사라고도 함) 참석자들에게 ‘왜 성당에 다니는지?’를 물었을 때도 ‘평화와 위로를 얻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구요. 쉬고 있거나 개종을 생각해 본적이 있다는 신자들의 이유 또한 ‘평화와 위로를 얻지 못해서’가 압도적이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평화와 위로를 얻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늘 신자수가 증가하고 있구요.”
“아시다시피 프랑스교회를 오랫동안 ‘가톨릭의 맏딸’로 일컬었고, 국민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성당에 다니는 프랑스사람은 많지 않습니다.(2004년 통계로 5~8%)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단순하게 보면 이렇습니다. 갈구했던 곳에서 ‘평화와 위로’를 얻을 수 없었기에 떠나갔다고 봐야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가톨릭신자가 아닌 분들이 그곳에서 평화로움을 느낀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대다수가 가톨릭신자였던 사람들이 떠나간 거대한 프랑스 성당에서 가톨릭신자가 아닌 동양인이 평화로운 쉼을 누렸다는 내용은 참 재미있는 화두가 되어줄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언뜻 납득이 잘 안 가는데요.”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해드리겠습니다(마태오 11: 28).’입니다. 이 말씀의 따뜻한 향기를 따라 교회에 가면 ‘쉼’보다는 그 ‘쉼’을 위해 새롭게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교리를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익히느라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쉴 수 없게 되기도 하지요. 어렵사리 관문을 잘 통과하면 또 다른 새로운 일을 만나게 됩니다.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예수의 삶과 죽음을 따라 ‘빛과 소금’처럼 소리 없이 흔적 없이 녹고 스며들어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해야 하는데, 남에게 질세라 서로 경쟁하듯 열심히 ‘빛과 소금’ 역할을 하려는 통에 쉼은 불가능해지지요. 제도권교회는 선교나 전교 사명을 선포하며 이런 역할을 부추기는 셈이구요. 그 결과 ‘영혼의 쉼’이라는 참된 종교심을 통한 평화로운 공존보다는 교세확장을 위한 보다 나은 선교방식과 무한 고객감동의 경합에 휩쌓여 세속과 별반 다름이 없게 됩니다. 결국 끝없는 실망과 회복 불가능한 절망으로 지친 사람들은 스스로 떠나 다른 ‘쉼’을 찾아 방황하게 됩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자. 그렇다면 이번에는 사진작가님께 숙제를 드리고 싶습니다. 파리를 좋아하시니 언젠가 또 가시겠지요? 빛을 훔치듯 이번에는 사람들의 갈망을 훔쳐보는 겁니다. 파리의 성당에 미사 드리러 오신 신자들의 표정과 신자가 아니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성당에 오시는 분들의 표정을 담아서 비교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요? 이제 프랑스의 성당에는 가톨릭신자보다 구경 오는 관광객이 월등하게 많다고 하니 다양한 갈망을 훔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다시 우리나라의 성당에서도 같은 작업을 해 보는 겁니다. 훔친 표정을 바라보는 가늠자는 ‘평화로운 쉼’으로 하구요. 그런 다음에는 불교를 대상으로 같은 작업을 해 볼 수도 있겠지요.”
“갑자기 어려워지는데요.”
“모든 종교가 본질적으로 평화와 위로를 구하고 있는데, 현상은 그렇지 못하다고 보는 편이 더 정직할 것 같습니다. 쉼을 갈망해서 찾아온 이들에게 오히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쉴 수 없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오롯이 종교인들의 몫이겠구요. 겸허한 자세로 참된 성찰을 이루어낸다면 영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우리나라 대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성당들은 아직은 신자들이 넘쳐난다고 봐야합니다. 그러나 수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해온 유럽교회의 오늘이 우리의 미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렇다면 대다수가 떠나간 성당에서 우리는 북적이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상황을 직시할 때, 한국의 가톨릭신자들이 성당에서 ‘평화와 위로’라는 ‘쉼’을 얻고 있는지, 혹은 얻을 수 있을지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화두로 삼고 싶습니다. 신자가 아니면서 가톨릭교회 안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던 것을 인연삼아, 제가 드린 숙제를 작가의 소명으로 기쁘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세상의 평화를 바란다면 내가 평화가 되자.’라는 말이 있다. 또한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직하고 산다면 그 자체가 평화일수도 있다. 그런 말들을 다 긍정하고 간직하면서도, 거친 세파를 마주하며 아픈 현실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내게 ‘쉼’이란 훨씬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갈망이다.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찾아가 몸과 마음이 평화롭게 쉴 수 있는 곳 있으면 좋겠다. 그런 갈망을 채워줄 곳이 성당이나 법당이어도 좋겠지만, 하느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니 특정한 곳이 아닐 수도 있으며, 바로 ‘지금여기’일 수도 있겠다.
오늘 전시회에서 내가 만난 사진들처럼 내 노래도 누군가에게 ‘쉼’이 되면 좋겠다. 또한 내 갈망을 위한 예술작업이 다른 이의 갈망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기적을 이루어 가고 싶다. 보다 많은 이웃들이 ‘공존’을 통해 ‘평화로운 쉼’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를 노래에 담아본다. 22년 전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날, 지금은 사라져가는 LP로 출반되어 평화를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고 있는 노래다.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요하게 불러본다. 추억하기 좋은 이 가을밤에.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의 평화를 위해
‘이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거기 평화 바라는 사람 살고 있으면 평화 머물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까10:5~7)
내 집안에 평화 내 나라에 평화
온 누리를 향해 평화의 노래 불러라
내 겨레와 벗들 나 사랑하기에
평화의 노래가 넘치게 하리라.(시편122:6~6)
(김정식 사/곡 「평화의 노래」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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